의학소사

한국 최초의 병원이 기녀를 고용했던 이유는?


제중원은 개원 후 하루에 60~100명에 이르는 외래 환자를 진료했다. 이렇게 몰려드는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알렌은 5월 초에 내한한 미국 감리회의 스크랜튼의 도움을 1개월 정도 받았다. 

또 전도 선교사로 내한한 언더우드가 약의 조제를 도왔다. 하지만 알렌의 숨통을 결정적으로 터준 것은 6월 21일 도착한 헤론이었다.

그러면 제중원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진료를 받았을까?

이들 중에는 정부의 고위 관리를 포함한 양반 계층뿐 아니라 걸인이나 나병 환자 등 예전부터 천대받던 계층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886년 7월 엘러스의 합류로 부녀과가 신설되면서 여성만을 위한 진료도 이루어졌다. 알렌은 때로 상류 사회의 부인들을 치료하기도 했는데, 그리 썩 내키는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들이 제중원에 오게 되면 마당의 사람을 모두 내보내고 통행을 금지시키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진찰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자기 몸을 알렌과 같은 백인 남자 의사에게 내어 보이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고 완강히 진찰을 거부하는 경우도 많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남성이나 여성 모두와 자유로이 어울릴 수 있는 여러 명의 기녀를 뽑았다. 이 기녀들은 총명하고 유능했지만 이들을 계속 데리고 있는 것이 적절하지 않음을 알고 내보냈다.

이렇게 지위 고하, 신분,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전국의 모든 병든 사람들이 진료를 받았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제중원에서의 진료가 아주 민주적이었다고 평하였다. 제중원은 특권 계층만을 위한 병원이 아니었던 것이다.


<글 : 박형우, 박윤재/연세대 교수 www.press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