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소사

노망난 외과의사

  
   베를린 샤리테 병원의 교수 Ernst Ferdinand Sauerbruch (1875~1951)는 뛰어난 외과의사였다. 그는 음압장치를 개발하여 이전까지는 엄두도 내지 못하던 흉강내 장기에 대한 수술을 가능하게 했다. 

   또 폐결핵에 인공기흉법을 도입한 후 폐엽 절제를 시도하여 폐결핵의 외과적 치료를 개척한 것이나, 최초로심외막절제술에 성공한 것 등은 근대 흉부외과학을 확립한 공로자라는 평가를 받기에 손색없는 훌륭한 업적이다. 

   당시 그가 저술한 흉부외과학 교과서는 전 세계의 의사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차 대전이 끝나갈 무렵 사우어브루흐는 세계 외과학계의 태두(泰斗)로서 자기 인생의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평소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화를 잘 내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자비심이 깊고 매력적이던 그에 대해 동료들이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은 이 즈음의 일이었다. 

   하루는 비장절제술(splenectomy)을 집도하던 사우어부르흐가 비동맥(牌動脈)을 묶기도 전에 지혈겸자를 풀어버려서 출혈로 환자가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수술 현장에 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으나 의료계의 권위주의와 사우어부르흐에 대한 존경심은 이들로 하여금 이 사건을 비밀에 부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유사한 사건이 반복되었고 환자들은 자꾸 죽어갔다. 

   사우어부르흐의 조수들은 복잡하거나 위험한 수술은 되도록 다른 의사에게 받는 게 좋겠다고 환자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불행하게도 세속의 평판을 맹신하는 대부분의 환자들은, 특히 상태가 중한 환자일수록, 그에게 수술받기를 고집하였다. 

   점차 증세가 심해진  사우어부르흐는 간헐적으로 지적 능력을 상실하였고 이런 증상이 나타날 때면 자신의 행동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사우어브루흐도 자신이 수술하는 환자들이 많이 죽는다는 사실은 깨닫고 있었지만, 그 증례들이 원래 위중한 상태였으므로 사망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며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전후 서방 세계로 옮겨가지 않고 동독에 남은 유일한 명의(名醫)를 감싸고 도는 병원 당국 때문에 사우어브루흐의 치매성 수술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희귀한 종류의 장암(腸癌)에 걸린 소년을 수술하던 사우어브루흐가 종양부분을 절제한 다음 끊어진 장을 서로 이어주지 않고 각각의 끝을 따로따로 봉합해버리는 일이 일어났다. 

   조수들은 그 소년의 병이 워낙 악성이라서 수술이 성공하였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오래 살기는 어려웠다는 이유로 이 사건을 문제삼지 않았다. 

   그러나 우연한 경로로 이 일을 알게된 정부 당국이 진상 파악을 위해 조사관을 파견하는 사태가 발생함으로써 샤리테 병원의 비밀이 밝혀지게 되었다. 

   조수들은 자기들의 교수를 고발하는 일에 협조하지 않았지만 조사관은 부검소견서에서 사우어브루흐의 행위를 확인할 수 있었고 사건의 전말을 상부에 보고하였다.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당국은 의료윤리보다는 나라의 체면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결정을 내렸다. 사실을 낱낱이 밝히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모든 일을 덮어 둔채 그를 명예롭게 은퇴시키기로 한 것이었다.

   그 해에 동독 교육부는 교수의 종신제를 폐지하고 정년제를 도입하여 노교수들의 명예 퇴직을 유도하였다. 마지못해 사퇴서에 서명한 사우어브루흐는 은퇴 후에도 사립병원을 전전하며 엉뚱한 수술을 집도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재담/울산의대교수·인문사회의학. 의협신보 2001. 4.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