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소사

조선에 제국대학의 시대가 열리다!


1919년의 3·1운동이 일어난 후 조선인들 사이에 민립대학을 설치하자는 움직임이 있자 일제는 이에 동참하는 인사들을 탄압하고 기금 갹출을 방해하는 등 다각도로 저지하였다. 

동시에 조선교육령을 공포하면서 대학 설립을 추진하여 1924년 5월 6년제의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고 학생을 모집하였고, 1926년 의학부의 첫 교육이 시작되었다. 조선에 제국대학 시대가 열린 것이다.

평양, 대구 등 주요 지방 도시에서도 선교사와 일본인에 의해 약간의 의사가 배출되었다.

우선 평양의 경우, 1898년 북장로회의 선교 의사 웰스에 의해 의학 교육이 시작되어 10명이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았다. 하지만 의학 교육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반면 식민지 확장을 위해 의료 사업에 나섰던 동인회가 파견한 나카무라(中村富藏)는 1905년 4월 평양의학교를 시작하였고, 이것이 모체가 되어 평양동인의원부속 의학교가 만들어졌고 8명이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았다. 

경술국치 후 동인의원이 폐쇄되면서 의학 교육은 자혜의원의 의무과에서 이루어지다가 1911년 4월 조선총독부의 의학 교육 통합 방침에 따라 폐쇄되었다.

대구의 경우, 1900년대 제중원(동산기독병원)에서 의학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다. 또 평양에서와 같이 1907년 2월 대구동인의원부속 의학교가 만들어져 의학 교육이 이루어졌으나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은 사람은 없었고 학생들은 1910년 9월 대구자혜의원의 의무과로 이관되었다.

1920년대에 들어 모자라는 의사들을 충원하기 위해 평양과 대구에 사립의학강습회가 설치되었고, 이것이 모체가 되어 의학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우선 평양의 경우, 1923년 1월 의사 시험 준비자를 대상으로 의학 교육을 하기 위해 평양자혜의원 내에 야간의 사립의학강습회가 설치되었다. 이 강습회는 1923년 4월 지방비로 운영되는 2년제 도립평양의학강습소로 승격되었고, 의관과 의원을 강사로 촉탁하여 의학 교육을 진행했다.

그 후 만들어진 평양의전 기성회는 1929년 교명은 유지하되 규정을 개정하여 입학 자격, 수업 연한 및 내부 시설은 일반 의학전문학교에 준하도록 하였다. 

이후 기성회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의학전문학교 승격 운동의 결과, 마침내 1933년 3월 8일 의학강습소가 폐지되고 평양의학전문학교가 탄생하였다. 평양의학전문학교는 1933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한 이후 1945년 8월까지 13회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대구에서는 1923년 7월 경상북도립 대구자혜의원에 사설 의학강습소가 만들어졌다. 1924년 4월 의학강습소가 도비로 운영하게 되자 경상북도립 대구의학강습소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1926년 4월 경상북도 의학강습소로, 이어 1929년 5월 경상북도립 대구의학강습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33년 3월 의학강습소가 폐지되고 대구의학전문학교가 탄생하였다. 대구의학전문학교는 모두 841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일본인이 564명, 조선인이 274명, 대만인이 3명이었다.

평양과 대구의학전문학교는 전문학교 승격과 함께 총독부로부터 지정을 받아 졸업생들이 무시험으로 의사 면허를 받게 되었다.

평소 여성 의료인 양성에 관심이 많았던 로젯타 홀(Rosetta S Hall)의 제안으로 1928년 5월 여의학교 설립을 위한 기성회가 조직되었고, 우선 강습소 형태로 시작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1928년 9월 경성여자의학강습소가 개교하였다.

강습소는 1937년 김종익의 거액 기부에 힘입어 1938년 5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성장하였으며, 1941년 9월 부속병원이 개원했고 1945년 4월 총독부로부터 지정받았다.

<글 : 박형우, 박윤재/연세대 교수 www.perss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