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소사

제약업의 태동


서양 의학은 약 자체뿐 아니라 제도로서도 한국에게 다가왔다. 서양에서 성립된 의료제도가 한국에 수용되기 시작했다. 약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900년 1월 약종상 규칙이 반포되었다. 약종상은 '약품을 판매하는 자'라는 정의가 내려졌고, 지방 관청의 허가를 받은 후에야 판매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은 약제사를 모아 시험을 치르게 하였다. 시험에 합격한 자에게는 준허장(準許狀)이 수여되었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약을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통의 한의학은 외국에서 밀려오는 약뿐 아니라 새로운 제도에도 적응해야 했다.

서양 의학이 강한 힘을 가지고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지만, 한약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한국인들이 가진 한의학에 대한 신뢰가 높았기 때문이다. 설령 수용을 한다고 해도 방법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배울 곳이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한약은 자신의 전통 지식에 서양 의학을 가미하는 식으로 변화해 갔다. 가장 주목되는 변화는 약 자체보다 유통이었다.

특정 약품들을 판매하는 대형 약방들이 생겨났고, 그들은 점차 전국적인 유통망을 만들어 나갔다. 소화제로 유명한 청심보명단의 제생당약방(1899년 창립), 부인병 치료제인 태양조경환으로 유명한 화평당약방(1904년 창립) 등이 그들이었다.

'조고약'의 천일약방도 있었다. 약간 나이 든 어른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종기약인 조고약은 원래 조 씨 집안에서 내려오는 비약(秘藥)이었다. 천일약방(1913년 창립)을 세운 조근창은 그 약을 상품화하였다. 대량 생산, 대량 판매가 이어졌다. 그들은 현대 한국 제약회사의 원조들이었다.

대형 약방들이 생겨나면서 경쟁도 치열해졌다. 누가 먼저냐는 원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고, 정부의 허가를 받기 위한 노력도 이어졌다. 판매를 위한 광고 경쟁은 뜨거웠다. 신문과 잡지에서 약 광고가 차지하는 비율은 절대적이었다. 공정함을 가장하고 간접적으로 광고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화평당에서 제조한 태양조경환을 여러 해 동안 아이를 갖지 못한 부인이 복용하고 수태하여 지금은 5달이 지났으니 그 신효함이 놀랍다."

광고가 아닌 신문 기사 내용이다. 지금이라면 실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식민지 시기에 접어들면서 한국인이 만든 양약이 시장에 나오기 시작했다. 유일한의 유한양행(1926년 창립), 전용순의 금강제약(1929년 설립)은 그 흐름을 주도했다.

유한양행은 1930년대 중반 설파제인 프론토질을 실시간으로 수입하여 'GU사이드'라는 이름으로 판매함으로써 도약을 하게 된다. 프론토질은 페니실린이 발명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항생제의 대표와 같은 역할을 하던 약이었다.

금강제약은 1929년 마약 성분을 함유한 '네오페지날'이라는 이름의 약품을 판매하여 기반을 확보하였다. 1938년에는 한국 최초의 합성약인 '젠바르산'을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젠바르산은 성분은 매독 치료제로 잘 알려진 살바르산이었다. 1910년 독일에서 발명된 살바르산은 19세기 말 이래 발전하고 있었던 세균학의 미래를 밝히는 횃불과 같았다. 한 세대 가까이를 지나 한국이 그 살바르산을 합성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글 : 박형우, 박윤재/연세대 교수 www.perss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