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소사

1919년 3월 1일, 의대생도 '만세'를 불렀을까?

   3·1운동은 우리 근대 민족 운동사의 분수령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 피압박 민족 해방 운동의 한 가지 원류가 되었다는 데에는 다른 견해가 거의 없는 듯하다. 

   나는 3·1운동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그것이 근대 한국의 출발점이며 또 이 땅에 근대적 시민 계층의 탄생을 알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거족적으로 표출된 해방과 독립의 의지는 이후 항일 무장 투쟁, 의열 투쟁, 교육운동, 문화운동, 노동운동 등의 원동력이 되었다. 해방은 이민족 압제뿐만 아니라 봉건적 족쇄로부터의 해방을 함께 뜻하는 것이었으며, 독립 또한 나라뿐만 아니라  개인의 독립도 의미하는 것이었다.

   흔히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미국, 소련, 영국 등 연합국에 힘입어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한다. 전혀 틀리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이 끈질기고 강력한 독립 투쟁을 벌이지 않았다면 전승국들의 전후 처리와 그 뒤의 역사는 우리에게 더욱 불리하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3·1운동이 시작된 지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아 수립된 망명 임시정부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긴 26년이라는 세월 동안 독립운동에서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임시정부가 채택한 국체와 국호가 "대한민국"이라는 점이다. "대한"은 이어받았지만 경술국치 전의 "제국"을 벗어던지고 "민국", 즉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민주공화국"이 된 것이다.

   우리에게 근대를 가르쳐 준다는 것을 "일한 합방"의 명분으로 내건 일제가 시대착오적인 "천황제 국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의 일이다. 
이 한 가지만으로도 일제의 침략과 지배가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지, 그리고 근대화 역시 우리가 자주적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잘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사회는 국왕의 목을 베거나 매달지 못해서 진정한 시민혁명을 거치지 못했다고 한다. 프랑스대혁명과 비교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프랑스는 루이16세의 목을 치고도 제정과 왕정 복고를 거듭 경험하고 나서야 겨우 공화국을 세울 수 있었다. 3·1운동은 고종(高宗)의 죽음을 한 가지 계기로 하여 일어났다. 우리 선조들은 국왕의 시신을 땅에 묻으면서 왕정도 함께 과거에 매장시켰다. 그리고 공화국에서 제왕을 망상하는 자들의 권력은 근대적 시민들에 의해 번번이 박탈되었다. 임시정부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3·1운동은 4·19혁명, 그리고 1987년 6월시민항쟁과 마찬가지로 거족적인 운동이었으므로 특정 개인, 집단, 지역, 단체, 학교, 종교, 계층, 직업 등의 역할을 특별히 내세울 여지는 없을 터이다. 때때로 이기적이고 사회적 역할에 충실치 못하다는 평가를 듣는 의학생들은 당시에 어떤 행동을 보였을까?

   당시는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기 전이라 전문학교가 최고 학부였다. 6개밖에 없던 전문학교 가운데 의학전문학교가 둘로 경성의전과 세브란스의전이 그것이다. 경성의전은 총독부가 관할하는 '관립'이고 세브란스의전은 기독교의 여러 교단이 연합으로 운영하는 '사립'이었다.

  조선총독부의 보고자료(1919년 4월 20일자)를 보면 구금된 학생 가운데 경성의전이 가장 많아 31명이고, 경성고보(22명), 보성고보(15명), 경성공전(14명), 경성전수학교(12명), 배재고보(9명), 연희전문(7명), 세브란스의전(4명)이 그 뒤를 이었다. 또 <매일신보> 11월 8일자에 의하면 검거되어 판결을 받은 학생 역시 경성의전이 30명으로 가장 많고, 경성고보(29명)를 비롯하여 여러 학교가 다음을 이었고, 세브란스의전 학생은 10명이었다.

   경성의전 학생으로는 김형기(1년), 이익종(10월), 김탁원ㆍ최경하(이상 7월) 등이, 세브란스의전 학생으로는 배동석(1년), 김병수(8월), 최동(7월) 등이 실형을 선고받았다. 

<황상익/서울의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