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소사

세브란스의 첫 졸업생 배출


알렌이 의학 교육을 시작한 지 22년, 에비슨이 의학 교육을 시작한 지 10여 년 만인 1908년 6월 3일 오후 4시 첫 졸업생이 배출되었는데, 김필순, 김희영, 박서양, 신창희, 주현칙, 홍석후, 홍종은 등 7명이 그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직접 간접으로 한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과 접촉이 있었다. 김필순과 홍종은은 한국 최초의 교회가 세워진 장연 출신이며, 김필순, 김희영, 홍석후는 배재학당 출신이었다. 

홍석후는 부친이 언더우드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박서양은 부친 박성춘을 통해 에비슨과 알게 되었고, 주현칙은 선천에서 선교의사 셔록스에 의해 의학교육을 받은 후 세브란스에 입학하였다.

졸업식을 위해 잔디밭과 테니스장에 통감부에서 빌려 준 육군용 큰 텐트가 세워졌고 7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도록 의자들이 놓여졌다. 

많은 깃발들이 장식되었는데, 주요 하객들의 국적을 알리기 위해 태극기와 일장기가 병원 구내로 들어가는 입구 위에 장식되었고, 병원 주체의 국적을 알리기 위해서 성조기가 병원 위에 걸렸다.

태극기는 한쪽의 높은 장대에, 에비슨의 국적을 나타내는 영국 국기인 유니온 잭은 다른 장대에 걸려 있었으며, 텐트 위에 많은 태극기와 성조기들이 걸려 있었다. 단상 뒤에는 두 개의 대형 적십자기가 텐트의 벽에 걸려있었다.

단상에는 100명의 주요 인사들을 위한 자리가 마련되었는데, 단상 전면 앞자리에는 졸업생들을 앉게 했다. 이토 통감은 가운데 귀빈석에, 그 옆에 중추원 의장 김윤식이 앉았고 사회자인 게일, 교장인 에비슨, 허스트가 앉았다. 

이외에 정부의 고위 관리, 통감의 측근 등 일본의 고위 관리, 서울에 사는 대부분의 외국인들, 그리고 서울과 그 근방의 교회에서 온 많은 한국인 부부 등 거의 천 명이 참석함으로서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야말로 서울의 일대 사건이었다.

졸업식 다음 날인 1908년 6월 4일 졸업생에게는 내부 위생국으로부터 한국 최초의 의사 면허인 의술개업인허장이 수여되었다.

에비슨에 의해 이루어진 의학 교육은 크게 세 측면에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우선 에비슨의 의학 교육은 한국 서양 의학의 토착화 과정 그 자체였다. 김필순, 홍석후, 홍종은 등은 에비슨의 지도로 거의 전 과목에 걸쳐 우리말로 된 의학 교과서를 편찬하였다.

그리고 알렌, 헤론 시대와 달리 정규 졸업생을 배출함으로써 이들이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 면허인 의술개업인허장을 취득하게 하였다. 즉 의학 교육이 교육 자체로서의 의미를 넘어서 사회적 공인 과정을 밟는 단계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들은 모교에 남아 후학을 양성함으로써 서양 의학이 한국에 뿌리를 내려 자생할 수 있는 토대를 쌓았다. 7명의 졸업생 중 주현칙을 제외한 6명은 의학교에 남아 후배 교육은 물론 간호원양성소에서도 강의를 담당하였다. 이들 중 김희영과 신창희는 1년 동안 간호원양성소 교수로 있다가 개업하였다.

김필순은 에비슨의 후계자로 1910년 의학교의 책임자인 학감에 임명되었고, 졸업 직후 병동과 외과의 부의사로 임명된 후 1911년에는 병원의 외래 책임자가 되었다. 

박서양은 화학, 이어 외과 교수로 활동하였다. 홍난파의 형인 홍석후는 제1회 졸업생 중 가장 오래 학교에 남아 안·이비인후과 교수로 활동했으며, 세브란스동창회를 조직하고 학감 등을 역임하였다. 

이들은 모교 이외에 보구여관(保救女館)의 감리회 간호원양성학교에서도 강의를 담당하였고 이들이 세브란스병원에서 실습하는 것을 도와주는 등 큰 역할을 하였다.

<글 : 박형우, 박윤재/연세대 교수 www.perss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