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소사

몽골의 '슈바이쳐' 로 불리는 이태준 열사

1. 몽골인들에게 현대적 의술 베풀어

 자이승 승전탑 아래 이태준(李泰俊1883∼1921) 열사 기념공원은 연세대 의대와 몽골 연세 친선병원, 그리고 한국 주재 몽골 대사관의 노력이 컸으며 몽골 정부가 2천평의 부지를 제공하고 연세대에서 공원 조성 비용을 부담하였다. 

조국 광복을 위한 항일 운동의 최전선에 활동했던 이태준 열사가 한ㆍ몽 친선의 상징적 인물로서 감격스럽게 부활한 것이다. 

이태준 열사는 세브란스 의대를 졸업한 뒤 광복 운동에 뛰어들어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다가 몽골의 울란바토르에 정착, 광복 운동과 함께 몽골인들에게 헌신적인 의료 봉사로 「몽골의 슈바이처」라는 말을 듣고있다. 

이태준 열사는 1883년 11월 23일 경남 함안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24세 되던 1907년 세브란스 의대에 입학, 3년 9개월 뒤인 1911년 6월 21일 졸업했다. 이 열사는 재학 시절부터 항일 운동에 적극 참여, 안창호(安昌浩)의 권유로 비밀 청년 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담했다. 

학교를 졸업한 이 열사는 잠시 세브란스 병원에 근무했다. 그러다가 1911년 10월 중국에서 신해(辛亥)혁명이 일어나자 크게 감동을 받았고 중국 망명을 결심한다. 결국 그 이듬해 초 이 열사는 한국을 탈출해 중국 남경으로 망명했다. 

이 열사는 남경에서 기독회의원의 의사로 일하게 된다. 직업은 의사지만 이 열사의 하는 일은 중국에 나와있는 다른 독립 운동가들과 함께 조국 광복 운동에 열을 쏟는 일이었다. 

이 열사가 몽골의 고륜(庫倫. 당시 Urga. 지금의 울란바토르)로 간 것은 1914년이었다. 이 열사의 몽골 행은 김규식(金奎植)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김규식은 미국의 르녹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새문안 교회의 장로로 있으면서 광복 운동에 참여하다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 투사다. 

2. 몽골인이 가장 존경하는 한국인. 

김규식 장로가 이 열사를 몽골로 갈 것을 권유한 것은 김 장로가 몽골에 비밀 군관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에 정착하게 된 이 열사는 1921년 일본군에 의해 피살당하기 전까 지 7년 동안 몽골에서 활동했다. 울란바토르에 온 이 열사는 이곳에서 동의의국(同義醫局)이란 병원을 개업했다. 

이때의 몽골 사람들은 라마불교의 영향으로 병에 걸리면 기도나 드리고 주문이나 외우는 등이 고작이었다. 이 열사는 이런 몽골인들에게 현대적인 의술로 치료하면서 헌신적인 봉사를 했다. 이런 이유 등으로 이 열사는 몽골인들에게 존경받는 인물로 추앙 받았고 이로 인해 몽골 국왕의 어의(御醫)가 되었다. 

당시 몽골엔 전체 국민의 70∼80%가 성병에 감염되어 있었다. 이 열사는 성병 치료와 퇴치에 온 힘을 쏟아 성병이 몽골에서 사라지게 했다. 이런 지대한 공헌으로 이 열사는 몽골의 영웅이 됐다. 몽골 국왕은 이러한 공로로 1919년 7월 이 열사에게 국가 훈장을 수여했다. 

이 열사는 몽골에서의 이런 두터운 신뢰를 배경으로 각지의 애국지사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항일 활동에 크게 기여했다.

이 열사의 항일 활동은 필요한 단체에 항일 자금 지원과 러시아로부터 받은 막대한 독립 지원금을 상해 임시정부까지의 비밀 운송을 하는 일 등이었다. 그리고 이 열사의 병원엔 각지에서 온 항일 운동가들로 언제나 여관처럼 붐볐다. 

몽골의 울란바토르를 거점으로 러시아, 중국 등을 무대로 활동하던 이 열사가 일본군 장교에 체포된 것은 1921년 2월 3일 울란바토르에서였다. 그리고 이 열사는 체포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참히 학살당했다. 그 때 이 열사의 나이는 34세였다. 

이열사의 짧고 극적인 일대기는 우리 나라에서 보다 몽골에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한국 정부는 1980년에서야 이 열사의 공적을 인정하여 서훈(敍勳)했다.   

현재 이 열사의 무덤은 몽골에 있다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 그 소재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몽골 정부는 현재 현상금을 걸고 이 열사의 묘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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