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소사

무균 수술법의 개척자  리스터

   
  파스퇴르의 미생물에 관한 기초적 연구를 실제로 임상의학에 응용하여 발전시킨 사람은 리스터(Joseph Lister, 1827-1912)였다. 그는 1827년 4월 5일 영국 에섹스 지방의 업톤에서 태어났다. 

  퀘이커 교도이며 와인을 취급하는 상인이었던 그의 아버지 죠셉 잭슨 리스터는 여가가 나면 스스로 현미경을 만들었는데, 당시 색수차가 없는 현대적 현미경 렌즈를 만든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였다. 

  리스터는 1852년 런던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스승들의 권유에 따라 에딘버러대학의 외과교수였던 심(Syme)의 조수로 들어갔다. 

  그는 여기서 심의 큰딸과 결혼하였으며 1860년에는 글래스고우대학의 외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리스터는 1852년 홍채가 평활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평활근의 수축과 이완에 의해 눈동자의 크기가 조절된다는 사실을 최초로 밝혀내었고 1880년에는 생체 내에서 흡수되는 봉합사(catgut)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외과 수술에 소독의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것이었다. 파스퇴르가 발표한 와인의 발효와 부패에 관한 논문에서 힌트를 얻은 리스터는 수술 후 감염을 막기 위해 상처 부위와 수술장을 소독하는 방법을 찾고 있었다. 

  세균을 죽이는 물질을 찾는 연구를 시작한 그는 염화아연, 황화합물에 이어 세 번째로 시험한 석탄산(carbolic acid)-하수도 소독용으로 쓰이고 있었다.

   이 살균효과가 있음을 확인하였고 마침내 이 석탄산을 사용하여 1865년 8월 12일 마차에 깔려 경골(tibia) 부위에 복합골절을 입은 소년을 다리를 절단하지 않고 수술하는데 성공하였다(이 소년은 6주 후 걸어서 퇴원하였다).  

  1867년 그는 '외과 치료에서의 무균적 수술법’이라는 논문에서 1864년에서 1866년에 걸쳐 글래스고우에서 시행된 일반적인 사지절단수술의 사망률은 45%에 달했었지만, 1865년에서 1867년에 걸친 무균적수술은 주요 절단수술 환자 40명 중 6명만이 사망하여 사망률이 15%로 낮아졌다고 보고하였다.

  파스퇴르의 이론에 의하면 세균은 공기중의 어디에나 있을 수 있었으므로 리스터는 수술장의 공기를 석탄산 스프레이로 정화하였고, 상처 부위는 석탄산, 액상 레진, 파라핀으로 적신 8겹의 붕대로 밀봉하였다.

  이 리스터의 폐쇄적 드레싱(occlusive dressing)은 보불전쟁이 끝날 무렵 많은 군의관들에게 채택되어(이 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수술을 받은 환자 13,000명 중 10,000명이 사망하였다)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수 년 후 코흐에 의해 상처 부위에 주로 감염되는 병균의 실체가 밝혀지자 무균수술법은 더욱 확고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리스터는 뛰어난 기술을 가진 외과의사는 아니었다. 그는 성실하고 주의 깊게 정확한 수술을 하는 시술자였으며, 당시의 의사들이 금기로 생각하던 복강이나 흉강을 침범하는 수술은 평생동안 시도할 엄두도 내지 않은 신중하고 온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도덕적인 면에서도 남달랐던 리스터는 1883년 젬멜바이스의 업적을 듣고 무균소독법의 선구자가 자신이 아닌 젬멜바이스였다는 점을 흔쾌히 인정하였다. 

  1869년 리스터는 스승 심의 뒤를 이어 에딘버러의 임상외과학 교수가 되었으며 1877년에는 런던 킹즈 칼리지(King's college)의 외과 교수가 되어 l892년까지 재직하였다.

  l883년에 준남작의 작위를 서훈받고 1897년 의사로서는 최초로 영국 귀족연감에 오른 리스터는 1895년부터 1900년까지 왕립학술원의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마취제 사용과 함께 외과수술의 2대 혁명으로 불리는 무균수술법은 이렇게 탄생했다. 의사가 백색가운을 입게 된 것도 그의 발명이다. 이 공로로 그는 의사로는 최초로 남작(男爵)이 됐으며 1998년 라이프지가 뽑은 ‘지난 1천년의 세계사를 만든 100대 인물’로 선정되기도 했다. 


 <글 : 이재담/울산의대교수. 인문사회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