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소사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한국 역사상 최초로 여의사가 등장한 때는 1900년이었다. 이 해는 서재필이 조지 워싱턴 대학을 졸업하고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의사가 된 5년 후였다. 

   당시는 아직 한의사들이 진맥을 할 때에도 내외가 심했던 때였다. 또한 콜레라가 만연하자 그것을 쥐가 옮긴다고 해서 쥐를 몰아내기 위해 대문에 고양이를 크게 그려 붙여 놓던 시절이었다. 

   박에스터. 그녀가 바로 남자들도 엄두를 낼 수 없었던 서양 의술을 맨 먼저 익혀 귀국한 여성이었다. 당시 나이는 불과 24세. 그녀는 1876년 서울 태생으로 본명은 김점동(金點童)이라 했다. 에스터는 세레명이고, 성씨는 남편의 성씨를 따른 것이다. 

   박에스터가 의사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그녀의 아버지 김홍택이 선교사 아펜셀러의 집에서 잡일을 봐주고 있던 점과 연관이 있다. 유달리 총명한 그녀는 당연히 선교사들의 눈에 띄었고, 이것이 그녀가 이화학당에 들어가 교육을 받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10세. 그녀가 17세 때 쓴 수기에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이화학당장이던 스크랜튼 부인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아주 추운 때였는데 스크랜튼 부인은 나를 스토브 가까이 오라고 하셨다. 나는 그 전에 스토브라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처음에 그 서양부인이 나를 그 속에 집어 넣으려는 줄 알고 겁을 잔뜩 먹었다." 

   박에스터는 특히 어학에 특출한 재능을 보였다. 그리고 그런 점은 그녀가 여의사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결정적인 기회를 가져다 주었다. 당시 유일한 여성 전문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 ; 지금의 이대병원 전신으로 정동에 있었다)의 여의사 로제타 홀로부터 미국 유학 권유를 받은 것이었다. 

   그때 김점동의 나이는 17세. 그녀는 보구여관에서 통역 겸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고, 특히 로제타 홀이 언청이 수술을 해서 고쳐주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로제타 홀은 또 남편 홀박사 밑에서 일하고 있는 박유산을 소개해서 결혼에 이르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2년 후 김점동은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박에스터가 수학한 곳은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이었다. 

   그녀는 이곳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곧바로 귀국, 보구여관에서 일했다. 보구여관에서 일하던 중에도 그녀는 틈만 나면 당나귀를 타고 시골로 가 환자를 돌보았다. 그녀가 돌본 환자는 3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인으로서는 드물게 선구자적인 길을 걸었던 그녀는 34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병명은 폐결핵이었다. 남편 박유산은 그녀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기 8개월 전에 역시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김은신/소설가, 사료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