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소사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의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


   중세까지 갈레노스(Claudios Galenos, 129~199)의 의학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322)의 철학과 함께 교회의 권위가 뒷받침하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사람들은 로마 시대에 그가 돼지나 원숭이를 해부해 알아낸 사실들을 근거로 서술한 인체의 해부에 관한 지식을 절대 불변의 진리로 믿고 있었다. 

갈레노스의 해부학이 틀렸다고 지적하는 의학자는 곧 교회에 반항하는 것으로 여겨져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하지만 중세가 끝나갈 무렵, 전통적 권위에 맞선 저술이 탄생했다. 

과학자의 독립적인 비판정신을 의학분야에서 처음으로 보여준 이 저술이 바로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 1514~1564)의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De humani corporis fabrica libri septem)'였다.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라는 대가의 책에만 의존하는 학문이 아니라 인체를 직접 해부하고 관찰에 근거한 새로운 해부학을 제시했다. 

당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인체 해부가 금지돼 있었다. 드물게 허용되던 의학교 수업에서도 교수가 갈레노스의 책을 읽기만 하고 실제 해부는 조수가 강의와 무관하게 진행하는 수준이었다.

따라서 실질적인 인체 해부학은 사람의 몸을 자르거나 피를 뽑는 일을 하던 외과 의사들이 근육이나 골격 등 제한적인 분야에서 연구하며 명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중세 의학 책들은 그리스 의학을 받아들여 발전시킨 아랍 책들을 다시 라틴어로 번역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르네상스 시대에 그리스 고전을 직접 라틴어로 번역하는 운동이 시작돼 갈레노스의 해부학 책들이 새로이 발굴되어 번역됐다. 

이를 계기로 의사들이 다시 해부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예술이 흥성하던 시대적 분위기를 탄 화가나 조각가들 사이에서도 인체 해부를 공부하는 전통이 생겼다. 

이후 신분이 낮은 외과 의사가 담당하던 해부학 강좌는 박사학위를 가진 정규 의사가 담당하게 됐는데 그 효시가 된 사람이 베살리우스였다.

베살리우스는 1514년 지금의 벨기에인 브뤼셀에서 태어나 뤼벵에서 학교에 다닌 후 의학 공부를 위해 당시 최고의 의학 중심이었던 파리 대학으로 갔다. 

그는 여기서 해부학 실험을 하기 위해 공동묘지에서 시체를 훔쳐내기도 했다고 전한다. 파리에서 스승과 함께 해부학 책을 저술하기도 하며 이름을 떨친 그는 1537년 파도바대학의 초청으로 이탈리아에 가서 12월에 박사 학위를 받고 바로 다음날 해부학 및 외과학의 교수로 임명됐다.

베살리우스의 강의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교수가 직접 칼을 들고 인체를 해부하며 진행하는 해부학 강의는 그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베살리우스는 해부학 강의를 위해 사실적이면서도 예술적인 그림을 도입한 선구자이기도 했다. 

그는 1538년 학생들을 위해 6장으로 된 해부도를 만들었다. 베살리우스가 그린 처음 3장은(나머지 3장은 네덜란드의 화가 칼카르(Jan Stephan van CALCAR, 1499~1546)가 그렸다) 갈레노스의 책에 근거해 만들어져 실제 인체의 구조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베살리우스는 더 많은 시체를 해부하며 경험이 쌓일수록 갈레노스의 해부학에 틀린 부분이 있음을 확신하게 됐다. 드디어 갈레노스의 잘못을 수정해 새로운 해부학 책을 쓰기로 한 베살리우스는 2년 동안 밤낮없이 해부에 몰두해 책을 완성하고 스위스 바젤에서 인쇄, 출판했다. 

베살리우스가 서술하고 칼카르가 해부도를 그린 최초의 인체해부학 책은 1543년 6월, 베살리우스가 28세 되던 해에 출판됐다. 이 역사적인 책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는 7권으로 이루어졌으며 2절지 판 663페이지, 그림만 300개가 넘었다. 

1권은 뼈, 2권은 근육, 3권은 혈관, 4권은 신경, 5권은 복부와 생식기, 6권은 흉부, 7권은 뇌에 관해서 기술되어 있다.

<글 : 이재담 / 울산의대 인문사회의학교실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