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소사

고대 중국의 수술 및 마취

중국의 하층 계급인들 사이에 일부 마법과 샤머니즘도 존재하였으나 일반적으로는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병인론 즉 도교에서 말히는 음양과 오행(火, 水, 木, 金, 土)의 부조화에 의해 질병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사상이 수천 년에 걸쳐 이어져 왔다.

중국의학에서는 침과 여러 가지 종류의 약제가 사용되었지만 몸에 칼을 대는 것을 기피하는 유교의 영향으로 인해 외과학은 크게 진전되지 못하였다.

명의 편작은 내과적 질병을 주로 다루었으며 이에 대비되는 외과의사로는 후한시대의 화타(華院)가 유명하다. 화타는 삭골(削骨)할 때 마비산(麻佛散)을 환자에게 복용시켜 통증을 완화시키고 병소에는진통작용이 있는 약물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바로 인류 역사상 마취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마비산과 국소약물의 처방은 남아 있지 않으나 삼(cannabis) 이 주된 성분이라는 설도 있고 독말풀종의 꽃을 말린 양금화{洋金花)와 다른 몇 가지 생약으로 조제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출처 : 마취과학. 대한마취과학회 편저>

* 조조(曹操)가 중병에 걸리자 화타를 불러 치료하게 하였으나 화타는 진단하고 치료하는 데 오랜 기간이 필요하다고 하고서는 아내의 병을 칭탈하여 여러 차례 미루며 조조에게 가지 않았다. 

조조는 화타가 계속 미루자 분노하였고 화타의 아내가 정말 병에 들었는지를 살펴보고 참이거든 휴가를 더 주되 거짓으로 판명되거든 압송하라고 하였다. 

결국 화타는 압송되었으며 죄를 시인했으나 조조는 화타를 “쥐새끼 같은 자”로 언급하며 듣지 않고 화타를 고문하고 죽였다. 나중에 아들 조충(曹沖)이 병들어 죽게 되자 조조는 화타를 죽인 것을 후회하였다. 

죽게 된 화타는 옥졸에게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말하며 책을 주려 하였으나 옥졸이 불법행위를 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거절하니 화타도 강요하지 않고 그의 처방집인 청낭서(靑囊書)를 불에 태워버렸다. 

- 진수(陳壽) 삼국지 화타전